《우리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서문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전시하고, 그림으로 예술을 하고, 화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이 질문은 화가들의 개별 작업과 규칙을 파악하고 회화 매체(medium)의 특정성을 탐구하여 그 의미를 확보하는 것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화가들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지 들여다보는 것이 현대회화를 이해하고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첫 발걸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잠시 3년 전을 떠올려보자.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현대회화의 모험: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에서는 “급변하는 세상 속 현대미술의 개념이 무한 확장된 시대에서 가장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매체”인 회화를 조명하였다. 이 전시에서 화가들은 “세상의 기준과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설정한 채 묵묵히 나아가는”,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외롭고, 적막하며 좁은 가시밭길을 주저 없이 선택한” 모습으로, 그리고 거대한 파도와 거친 풍파를 마주한 작지만 당당한 뒷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얄팍하게 화가의 삶을 신화화하는 허상임에 틀림없지만, 때로는 화가 자신도 회화와 본인을 작고 고독한 모습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회화 작품은 화가 개인의 시각과 방법론을 온전히 화면에 드러내는데, 이미지를 독해하는 것이 익숙해진 지금, 화면의 한 부분만 엉성해져도 바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티가 나기 때문에 화가는 더 큰 부담감을 갖게 된 것일까? 또 그 오래된 역사를 축적한 캔버스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계속해서 과거를 참조해야 하는 고난이 따르기 때문일까? 물론 또다시 회화의 위기론을 꺼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회화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고자 하는 자리 역시 아니다. 만약 2020년대의 오늘날 화가에게 회화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사진이나 다른 매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의 회화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회화에 의한 것일 테고, 그것은 누군가의 회화가 회화 사회에서 고립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 네 명의 화가들은 서로의 회화를 이해하고 회화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화가로서의 현실적인 고민을 공유하며 전시를 기획했다.
강규건, 김소정, 박경진, 이혜성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회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들은 화가로 살아가며 고민하던 원초적이고 순수한 질문을 공유하고, 전시로 풀어보고자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시 몇 가지 질문으로 해석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열거될 수 있다.
“이것이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어떤 그림이 될 수 있을까?”, “내 삶이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여러 질문이 내포된 하나의 질문은 작가들의 형식과 맞물려 회화로 그리고 전시로 전개된다. 다시 그 질문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그 상황은 작업 시작에 화가가 캔버스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상상해보자. 하나의 회화를 만들 때의 시작, 구상한 계획에 맞게 캔버스의 규격을 정하고, 적절한 질감과 색감의 천을 골라 회화 재료가 안착할 지지체를 만들었다. 이제 화가들은 빈 화면을 마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