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청년작가 4인전>
우리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

*기간: 2022.07.05(화) - 07.22(금) 
*참여작가 : 강규건, 김소정, 박경진, 이혜성
*포스터디자인: 이진석
*주관 : 화인페이퍼갤러리
*후원 : 화인페이퍼 
*관람시간: 12PM - 7PM (일,월 휴관)


《우리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서문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전시하고, 그림으로 예술을 하고, 화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이 질문은 화가들의 개별 작업과 규칙을 파악하고 회화 매체(medium)의 특정성을 탐구하여 그 의미를 확보하는 것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화가들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을지 들여다보는 것이 현대회화를 이해하고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첫 발걸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잠시 3년 전을 떠올려보자.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현대회화의 모험: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에서는 “급변하는 세상 속 현대미술의 개념이 무한 확장된 시대에서 가장 보수적이며 전통적인 매체”인 회화를 조명하였다. 이 전시에서 화가들은 “세상의 기준과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향을 설정한 채 묵묵히 나아가는”,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외롭고, 적막하며 좁은 가시밭길을 주저 없이 선택한” 모습으로, 그리고 거대한 파도와 거친 풍파를 마주한 작지만 당당한 뒷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는 얄팍하게 화가의 삶을 신화화하는 허상임에 틀림없지만, 때로는 화가 자신도 회화와 본인을 작고 고독한 모습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회화 작품은 화가 개인의 시각과 방법론을 온전히 화면에 드러내는데, 이미지를 독해하는 것이 익숙해진 지금, 화면의 한 부분만 엉성해져도 바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티가 나기 때문에 화가는 더 큰 부담감을 갖게 된 것일까? 또 그 오래된 역사를 축적한 캔버스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계속해서 과거를 참조해야 하는 고난이 따르기 때문일까? 물론 또다시 회화의 위기론을 꺼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회화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고자 하는 자리 역시 아니다. 만약 2020년대의 오늘날 화가에게 회화의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사진이나 다른 매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의 회화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회화에 의한 것일 테고, 그것은 누군가의 회화가 회화 사회에서 고립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 네 명의 화가들은 서로의 회화를 이해하고 회화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화가로서의 현실적인 고민을 공유하며 전시를 기획했다.
 
강규건, 김소정, 박경진, 이혜성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회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들은 화가로 살아가며 고민하던 원초적이고 순수한 질문을 공유하고, 전시로 풀어보고자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서로에게 묻는다. “우리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다시 몇 가지 질문으로 해석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이 열거될 수 있다.
“이것이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어떤 그림이 될 수 있을까?”, “내 삶이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여러 질문이 내포된 하나의 질문은 작가들의 형식과 맞물려 회화로 그리고 전시로 전개된다. 다시 그 질문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그 상황은 작업 시작에 화가가 캔버스를 마주하는 순간이다. 상상해보자. 하나의 회화를 만들 때의 시작, 구상한 계획에 맞게 캔버스의 규격을 정하고, 적절한 질감과 색감의 천을 골라 회화 재료가 안착할 지지체를 만들었다. 이제 화가들은 빈 화면을 마주한다.

“이것이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이번 전시 명 《우리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를 처음 제안한 강규건(b.1990)에 따르면 그것은 “늘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빈 캔버스와 정돈된 재료들을 보면서 떠올리던 생각”이다.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한 그는 회화의 형상에 참조할 스마트폰 속 사진을 다시 천천히 뜯어볼 것이고, 어떤 때는 그가 인식도 하기 전, 감각을 체화한 손이 먼저 뻗어나갈 수도 있겠다. 강규건은 자신의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거대한 재난과 급격한 혼란 속에서 붓을 쥔 화가가 얼마나 무력한지, 현실의 재난 앞에 회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럼에도 회화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회화의 대상은 화가가 바라본 현상이나, 세상의 사건이 아니라 차라리 무기력한 화가 자신의 모습으로 정해진다. 얇은 레이어로 거칠게 스쳐 가는 붓질은 그의 설렘, 불안의 심리와 빠르게 섞여 들어 화면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화면 속 인물, 강아지, 풍경은 화면의 어둠 속에서 서서히 형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며, 적당한 형상이 나타나는 순간 스마트폰 카메라의 플래시와 함께 포착된다. 화면에 그려진 인물은 강한 빛에 의한 음영으로 표정을 알 수 없어 침울한 인상을 준다. 화면의 구도는 잘 찍기 위해 촬영한 사진의 안정적인 구도가 아니라 영상 타임라인 중 어느 한 프레임일 뿐인 순간의 모습이다. 그래서 더욱 화면 속 상황의 앞뒤 맥락을 상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것이 그림이 될 수 있을까?”, “나의 그림이 작품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되묻는 모습이고, 근본적인 고뇌, 가라앉은 정서와 우울, 예민해진 신경에 잠을 이루지 못한 화가의 한밤중 산책 장면이 된다. 

이것이 그림이 된다면 “어떤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이혜성(b.1991)의 경우, 강규건과 달리 조금 더 구체적인 ‘회화의 조형 과정’을 고민한다. 이혜성 역시 캔버스를 마주할 것이다. 그때 그는 이제 벌어질 조형 과정을 구체적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 고민들이 어떤 접근과 어떤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나올까?” 이혜성은 식물과 식물에서 파생되는 풍경을 소재로 회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회화는 풍경화나 정물화의 이미지보다는 회화의 과정이 강조되고, 화면 내부의 조형 논리로 구성된 추상화의 이미지와 더 가까워 보인다. 그는 마른/죽은 식물을 회화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안에서 삶의 유한한 시간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식물의 시간(회화의 내용)과 그것을 그리는 시간(조형의 과정)을 중첩하여 ‘시간을 축척’하는 회화를 만든다. 특징적인 것은 작지 않은 화면을 채워나가는 이혜성이 고수하는 붓이 세필이라는 것이다. 화면에 묘사된 식물은 큰 붓의 시원한 터치보다는 모든 화면에 세필로 집요하게 표현되는데, 세필의 사용은 세밀한 정밀 묘사보다는 작고 무수한 붓 자국이 스미고 쌓인, 노동, 수행성이 돋보이는 회화적 표면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점차 원근감은 사라지고 식물(주제물)이 배경 없이 가득 채워져 구상화와 추상화의 경계 또한 사라진다. 이렇듯 과정과 시간은 이혜성 회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질문이 항상 계획과 과정과 결과를 끊임없이 되뇌는 시뮬레이션이 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내 삶이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캔버스 앞에 선 화가들의 질문은 그림을 만드는 감정에 대한 고민에서 그림을 만드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그리고 그림 밖의 삶으로 이어지며 삶이 회화처럼 되고 싶다는 직접적인 소망으로 이어진다. 김소정과 박경진은 캔버스 앞에서 조금 더 먼 미래를 생각하며 ‘화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 박경진(b.1982)의 본업은 화가지만 생업을 위해 종종 촬영 세트장 만드는(그리는) 일을 한다. 그리고 그와 사람들이 세트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풍경은 다시 박경진 회화의 소재가 되어 작업실에서의 그리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순환은 반복된다. 이는 세트장 속 그림 그리는 모습을 단지 회화 작업으로 재현하는 것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예술과 생업으로의 그리기가 지속적으로 교차하며, 화가의 삶이 회화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주게 된다. 김소정(b.1991)은 골목의 담벼락이나, 길에서 본 여러 사물, 일상에서 발견한 풍경에서 느낀 정서와 감각을 가시화하는 데 중점 두고 있다. 이를 3차원으로 재현하거나 구조적으로 구축하기보다는 질감, 촉감, 유동성을 회화의 재료와 물질적 조형으로 화면에 재구현한다. 실재하는 사물과 풍경들을 단지 시각적으로, 이미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감을 동원하여 만지고, 냄새 맡고, 듣고, 정서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그것을 화면으로 옮기는데, 이 방법은 삶을 회화로 옮기는 시도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이 그림처럼 될 수 있을까? 삶이 그림처럼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에 대해서는 전시 기획 단계에서 김소정이 영감을 받았다는 전시, 그리고 박경진이 과거 참여한 전시 《펜티멘토》(2018, 아트비트갤러리)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전시 설명 글에 의하면 “‘펜티멘토(Pentimento)’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실수나 우연에 의한 것이든 애초의 계획이 수정된 것이든, 덮여진 자취가 어렴풋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펜티멘토를 통해 회화와 삶의 방식이 닿아 있음을 설명하는데, 그것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수습하며 주저하다가 결단하고 어쩌다 얻은 행운을 간직하거나 망치기도 하는 우리의 삶과도 같은 한편의 드라마가 되는 것”이며, “살면서 경험하는 여러 감정들은 디지털 미디어에서처럼 간단하게 복붙(복사 후 붙여넣기)하거나 덮어쓸 수도 디가우징(Degaussing)할 수도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림을 그리는 매 순간마다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회화에는 몸을 어떻게 썼느냐,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가 모두 드러난다. 회화의 작업은 매 순간이 화면과 싸우는 과정이고, 그 속에서 화가들은 실패하고 좌절할 때도 많다. 그렇기에 회화는 가장 직접적이고 솔직한 매체이며,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다. “우리는 회화가 될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화가들은 “그럼에도 회화를 한다.”라는 식의 자기 연민의 대답이 아닌, 고민의 과정과 결과를 담은 작품을 통해 ‘회화에 대한 확신이 담긴 선언’으로 대답한다.


글. 이민훈 (미술비평)